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문단 편집) === [[중동전쟁]] 시기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팔레스타인 아랍인]]간의 물리적 충돌 === >“내 나이 열 두 살이었던 1948년의 비극은 나와 내 가족에게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집과 영토를 빼앗기고 내쫓긴 후 오랜 세월동안 망명자로 살아야 했고, 소멸된 과거와도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집트에서 보낸 나의 유년 시절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고 사고를 체계화 했던 법을 배우면서 보냈던 학생 시절이, 팔레스타인 망명 1세대로 아랍 세계 전역에 흩어져서 빌어먹을 법률 때문에 귀화도 할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고 여행도 할 수 없고 매달 경찰에 의무적으로 등록과 재등록을 반복해야 하고, 대량학살의 현장으로 변한 베이루트의 사브라와 샤틸라 같은 끔찍한 캠프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 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것처럼 고통스러웠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축하할 땐 분노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5660&cid=59014&categoryId=59014|에드워드 사이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과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국가를 세웠으며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을 학살하거나 추방하고 팔레스타인 땅을 강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https://en.m.wikipedia.org/wiki/Deir_Yassin_massacre|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 사건(100~120명 학살)]]과 [[https://en.m.wikipedia.org/wiki/Al-Dawayima_massacre|알다와이마 마을 학살 사건(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해서 80~200명 강간살해 등 학살)]], [[https://en.m.wikipedia.org/wiki/Abu_Shusha|아부 슈샤 마을 학살 사건(60~70명 강간살해 등 학살)]] 같은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이외에도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강간살해 등 수없이 많은 잔학행위와 학살사건들이 발생하였다. [[https://en.m.wikipedia.org/wiki/Killings_and_massacres_during_the_1948_Palestine_war|출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여성과 노인, 아이들의 경우에는 학살하거나 추방하였지만 젊은 남성들은 이스라엘 각지의 수용소에 잡아가서 1955년까지 강제노동을 시키기도 하였다. [[https://zochrot.org/en/article/51019|출처1]] [[https://al-awda.org/on-israels-little-known-concentration-and-labor-camps-in-1948-1955/|2]] 전쟁 기간 통틀어서 1만 5천명 정도의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에는 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지만 식량과 물자도 없이 추방되어 사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피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군이 완전 철수하며 영국의 위임통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기 이전에 이미 유대인 민병대인 이르군과 슈테른갱이 팔레스타인 중부에 위치한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데이르 야신 마을의 유지들이 당시에 이미 유대인들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후 들이닥친 공격대의 학살에 최소 107명의 마을 주민들이 학살되거나 처형되었다. 학살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으며 피해자의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 민병대 장교 한명이 학살을 중지하도록 명령한 뒤에야 포로로 잡힌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 주민들의 공개적인 모욕과 욕설을 들으며 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지역까지 강제로 걸어간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이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 사건에 대한 소식은 아랍 세계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이후 팔레스타인 북부 항구도시인 하이파가 유대인 민병대에게 점령당한 뒤에는 위임통치령 전역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학살과 잔학 행위는 꾸준히 빈번하게 계속되었고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중 85%에 달하는 70만명 이상이 가자지구나 서안지구 등지로 쫓겨나 난민이 되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 난민들의 귀환을 막기 위해 400개에서 600개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아랍 마을들을 거의 완전히 파괴하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점령지를 떠나서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에 정착하게 된 난민들을 기원으로 한다.[* [[https://en.m.wikipedia.org/wiki/Deir_Yassin_massacre|영문 위키백과 출처 페이지 링크 1]], [[https://en.m.wikipedia.org/wiki/Killings_and_massacres_during_the_1948_Palestine_war|2]], [[https://en.m.wikipedia.org/wiki/1948_Palestinian_exodus|3]], [[https://en.m.wikipedia.org/wiki/Nakba|4]], [[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towns_and_villages_depopulated_during_the_1947%E2%80%931949_Palestine_war|5]]][* 유진 로건, 이은정 옮김,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까치글방, 2016;개정판 2022)] 다만, 한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추방하지는 않았고 1차 중동전쟁이 끝날때까지 추방을 면하거나 난민이 되더라도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난민이 된 소수의(대략 전체 인구의 15%)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시민으로 귀화해서 살아가는 상대적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이스라엘에 현재에도 소수지만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이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추방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주로 서안 지구와 인접한 삼각 지구(Triangle Area)와 북부 갈릴리 중앙부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경우 기독교인 수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전부 추방하는 것은 기독교 국가들을 자극하거나 아니면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큰 아랍 도시인 나자렛의 경우 이 지역의 교회들이 바티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일부를 추방하지 않거나 추방하더라도 귀환을 허용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중 다수는 고향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차지한 이집트,요르단으로 떠났지만 이스라엘 국내에서 난민이 된 국내 난민(internally displaced Palestinians)들이다. 당장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큰 아랍 도시인 나자렛 같은 경우에도 전체 인구의 60%가 자신들의 원래 고향에서 추방당한 국내 난민들이다. 이들 역시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미 대부분의 유대인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해야 한다는 조기의 목적은 달성되었고 따라서 일부 팔레스타인 아랍인 정도는 남겨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이 경우 지역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부나마 남기거나 돌아올 수 있게 허용해 주는 면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지역 중 앞서 말한 팔레스타인 아랍 시민들이 밀집해 거주하는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거의 대부분 아랍인들이 완전히 추방당했으며 현재까지도 아랍인 거주민의 수는 극히 미미하다. [[https://en.m.wikipedia.org/wiki/Present_absentee|출처]] 또한 이스라엘은 1966년까지 자국 내의 모든 아랍인 시민들을 혹독한 군사 계엄령에 따라 통치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자국 내의 모든 아랍인 시민들의 토지를 자신들 마음대로 압류하거나 아랍인 시민들의 자본 투자와 취업과 같은 경제기반을 모두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랍인 시민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거의 완전히 차단하였다. 이 기간동안 아랍인 시민들은 허가증 없이는 여행조차 할 수 없었으며(이 통행 허가증마저도 거의 발급되지 않았다) 통행 금지령과 강제 구금, 강제 추방과 같은 일들을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군사 계엄령을 해제하는 1966년까지 지속되었다. [[https://en.m.wikipedia.org/wiki/Arab_citizens_of_Israel|출처]] 현재의 팔레스타인은 명목상으로는 이슬람 국가들과 반미국가들 그리고 [[스웨덴]]과 같은 중립을 표방하는 선진국들에게 독립 국가로 승인을 받았지만 [[대한민국]], [[영국]]을 위시로 하는 친미, 친서방 국가들과 이스라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해 봉쇄와 경제 제재, 정착촌 건설, 강제 추방, 토지 압류, 군사 점령 등을 계속하며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 [[https://en.m.wikipedia.org/wiki/Israeli_occupation_of_the_West_Bank]]]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